자기계발서 뒤집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오 저)”와 인문학
자기계발서 뒤집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오 저)”와 인문학
  • THE UNIV
  • 승인 2017.06.0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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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책 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이다. 차별에 찬성하다니, 사회적 금기를 대놓고 어겨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이런 의외성을 통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제목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다. 사실 나도 제목에 낚인 독자니까.

 

 

가끔 금기에 도전하는 것도 멋지지 않나?

 

 

무엇이 문제인가?

 

부제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이 책 내용을 요약한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늘날 20대의 생각과 문제를 묘사할 뿐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20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로 시작해, ‘20대 생각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이 책 내용의 전부다.
 

 오늘날, 20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 차별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저자는 심층 인터뷰를 통해 오늘날 20의 생각을 기술한다. 그렇게 기술된 사회 이슈에 대한 20대의 반응은 사회 일반의 상식보다 섬뜩하다. KTX 비정규직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 용산 철거민은 불쌍하지만 정부 상대로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생각. 전문대 졸업생은 논리력이 빈약할 것이라는 편견. 그리고 대학 서열화를 대학 로고가 박힌 야구 잠바로 드러내며, 난 너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모습까지.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노력(노오오오력!)’이다. 노력하지 않은 당신은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는 시선. 차별의 내면화는 이렇게 정당화된다.
  

  
차별무엇이 문제인가?

  하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인간 일반에 대한 공감보다 선행하게 된다.

  둘, 사회에서 편견이 확대 재생산된다. 이를테면, 대학 서열화를 통해 지방대는 무식하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짜장면 배달부’나 ‘환경미화원’과 같은 직업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셋, 사람을 스펙으로 재단하게 만든다. 내면보다 스펙을 통해 사람을 판단하게 만든다. 너와 나의 과거는 스펙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상 무가치하다.

  넷, 20대의 인생이 스펙 쌓기로 환원된다. 사회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20대의 인생은 처절하게 ‘관리’된다. 우정과 사랑을 누리고, 꿈을 찾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즉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모든 가능성이 ‘스펙’이란 이름 앞에서 부정된다.

 

차고 넘치는 취업정보 서비스 : 결국, 20대의 삶은 취준생과 예비 취준생이란 말로 요약된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 문제는 자기계발 논리.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이야기 좀 그만해라.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 일단 20대는 미쳐야 되나 보다.

 

저자는 세 가지를 주요한 원인으로 분석한다. IMF로 인한 부모 세대의 실패를 간접 학습한 것, 경영학이 지나치게 중시되는 학풍, 그리고 자기계발서의 범람.

  특히 저자는 자기계발서의 논리야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언급하며 증오한다. 끝없이 노력하고, 절제하고 인내하면 마침내 중대한 과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서의 논리가 20대들을 수렁에 빠뜨리는 악이라고 진단한다.
  이 분석은 개인의 노력이 한계가 있다는 상식적인 제약을 통해 현실성을 띤다.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것처럼,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 사회는 노력이 달콤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인가.

  강남 부동산 부자의 아들과 달동네 폐지 줍는 할아버지의 손녀딸 중 서울대에 합격할 가능성은 누가 높을 것인가? 변호사를 아버지로 둔 아들과 막노동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어느 쪽이 로스쿨 합격을 위해 유리한 정보를 취득할 가능성이 높을 것인가? 청년창업을 시도했다 실패한 100명 중 90명의 20대는 ‘죽도록 노력해도 벗어나기 힘든’ 가난을 선고받는 게 타당할 것인가?
  자기계발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자기계발서는 우리 사회가 ‘공평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가졌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대안 없이 비판하지 말라고문제 제기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공론화시킬 수 있으니까.

    끝으로 저자는 자신이 저술한 이 책이 '문제만 제기했지 대안은 없음'을 조심스레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를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아예 공론화되지도 못할 것 아니냐고 강변한다. 저자는 공론화된 이후에 사람들이 시끌시끌하게 모여 논의하면 담론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담론이 모인다면 마침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을 확신한다. 공감과 연대 / 소통과 상상이란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담론의 주된 방향일 것이란 저자의 추측은 낙관적인 전망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다.

 

 

<세 가지 정도가 조금 아쉽다. >

 

하나, 용어의 정의가 불분명하다. 이를테면,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기업 입장에서 비정규직은 아르바이트일 수도 있고 도급직/협력사 직원들일 수도, 혹은 2년제 기간직일 수도 있다. 비정규직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비정규직 문제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 저자가 사용한 연구 방법론이 아쉽다. 특히 연구의 표본 선택에 있어, 표본이 20대 모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저자가 주로 분석한 20대는 4년제 인서울 + 취업 준비생이라는 표본 한계가 있다. 더불어 일부 사례가 저자와 친밀했던 5명의 제자들의 이야기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사회과학자로서 연구의 엄밀함이 좀 떨어지는 것 아닌지 지적해 볼 수 있겠다.

  셋, '자기계발서'는 20대들이 차별을 내면화시키는 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서 때문에 자기계발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계발에 대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자기계발서가 튀어나온 거니까. 경영학 열풍 역시 20대들 생각에 직접적인 영향으로 작용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분명 경영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주요한 학문으로 취급받지만, 모두가 배우지도 않거니와 일반적인 학부생이 경영학을 배웠다고 마인드가 기업가처럼 된다고 가정하기에는 누락된 변수가 너무 많다고 본다.

 

 

<Book Analysis>

생명관리정치의 탄생_푸코 저

이 책을 읽는 내내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란 책을 겹쳐 생각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폭로한 푸코의 시각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직감이 들었달까.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가장 미시적인 사회 단위인) 개인의 행동에 '경쟁' 이데올로기를 심음으로써 사회를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타인을 넘기 위해 경쟁할 것. 경쟁하지 않는 개인은 도태될 것. 이 속에서 노동은 능력 자본을 통한 거래단위로만 취급된다. 노동뿐이랴. 인간의 시간조차 경제적 합리성을 통한 비용/편익 분석으로 설명되지 않는가. 마침내 인간의 모든 단위에까지 침투된 경쟁과 효율성이란 아이디어는 모든 정치적/사회적인 영역을 경쟁을 통해 극단적으로 효율을 추구했다는 경제적 영역으로 포획해버린다.

  푸코가 제안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해결책은 이 책의 논조와 다소간 닮아있다. 소통/연대/공감을 통한 상상력의 회복이야말로 경제에 포섭된 인간을 구원할 ‘인간성’이라고. 푸코는 개인이 자기 주체성을 찾고, 신자유주의에 반대되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자기규율의 원리에서 벗어남으로써 인간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인간성은 회복시킬 수단, 즉, 상상력의 회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푸코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해답은 'Liberal – Arts'일 것 같다.

 

 

<인문학은 우리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초판 인쇄 후 5년.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은 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저자는 ‘차별을 내면화시킨’ 20대를 괴물로 진단했지만, 오늘날 ‘차별을 내면화시키는 주체’는 20대뿐만이 아닐 테니까.
 
   노동 정책에는 문화적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
난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가 이번 정권의 행보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과도한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어떠할 것인가? 과연 새 정부는 노동 문제를 이런 문화적인 요인까지 고려해서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학을 위시한 교육체계 개편은 정부의 태도에 관한 주요한 바로미터로 작용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개인은 과도한 경쟁 논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인문학은 우리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체화해버린 ‘경쟁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는 자기 주체성을 회복하고 타인과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주체성의 회복이 인문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오늘날 인문학이 사회에서 환영받는 위치에 섰음을 긍정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문학은 정말로 '인문학'일까.

 상업-자본화된 인문학 속에서 (심지어 기업과 자기계발서에서 인문학이란 타이틀을 달고, 각종 인문학 강의를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로 노예 되기를 교묘히 강요하는 판에) 우리는 과연 '스스로 생각하기'라는 인문학의 주요 가치를 얼만큼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학창시절 – 기업 생활 내내 ‘답 있는 질문’에 지나치게 노출되어온 우리가, 그리하여 생활마저 답이 있다고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가, 그래서 중산층의 기준을 아파트와 자동차로 정리해버린 우리가, 자기 주체성 회복을 소망하며, 생각하는 방법마저 누군가에게 위탁한 채 답만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토해 볼 일이다.

 

기회균등+공정한과정+정의로운 결과를 만들 것이라는 대통령, 이제 인문학도 스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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